한국 현대 정치사를 이끌어왔던 ‘양김 시대’도 역사 속으로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22일 6년여전 먼저 세상을 떠난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뒤를 따라 영면의 길로 떠났다.
영호남을 대표하며 반세기 넘게 질곡의 한국 현대 정치사를 이끌어왔던 ‘양김(兩金) 시대’도 표표히 역사 속으로 저물게 된 것이다.
‘양김’으로 일컬어져온 두 전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에서는 손을 맞잡은 ‘동지’, ‘동반자’였지만 권력 앞에선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영원한 ‘맞수’이자 ‘경쟁자’였다. 파란만장했던 정치역정 만큼이나, 두 사람의 관계도 굽이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굴곡의 연속이었다.
YS 스스로 생전에 DJ와의 사이를 “가장 오랜 경쟁관계이고 협력관계”라며 ‘세계에서 유례없는 특수한 관계’로 표현했다. 2009년 8월 서거 직전 병상에서 사투를 벌이던 DJ를 병문안한 자리에서다.
두 사람은 출발점부터 달랐다. DJ는 전남 신안의 외딴섬 하의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고교를 졸업한 뒤 노력과 집념으로 정계에 뛰어든 자수성가형 정치인이었다.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시며 정치입문 과정부터 순탄치 않은 ‘인동초'(人冬草)의 삶을 살았다.
반면 경남 거제에서 지역 유지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YS는 1951년 당시 장택상 총리의 비서로 정치권과 인연을 맺은 뒤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27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기록을 세우며 화려하게 정계에 공식 입문했다.
출신 지역과 정치적 배경은 판이했지만 두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르는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한국 야당사의 대표적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하며 중대한 정치적 고비 때마다 협력과 경쟁을 이어갔다.
특히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을 시작으로 70년 대선후보 경선, 87년 대선, 92년 대선은 두 사람이 정치적 명운을 걸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진검승부를 펼쳤던 역사의 변곡점이었다.
첫 승부였던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은 YS의 승리였다. 하지만 ’40대 기수론’을 내세우고 야권 대선 후보 자리를 놓고 맞붙었던 70년 대선 경선은 DJ의 역전승으로 끝났다.
군사정부 시절은 두 사람에게 험난한 정치적 시련을 안겼다. 하지만 이들은 함께 손을 잡고 군사정권에 정면으로 맞서며 민주화의 동지이자 한국 야당사의 양대 산맥으로 우뚝 서게 됐다.
사진은 지난 2013년 3월 故 김 전 대통령 모습 <>
‘5·18 민주화운동’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던 DJ가 귀국한 1985년, DJ의 동교동계와 YS의 상도동계가 두 사람을 공동의장으로 해 결성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는 12대 총선을 계기로 야당을 복원한 뒤 직선제 개헌 운동과 87년 6월 민주항쟁을 주도하며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꺼져갔던 민주화의 불길을 되살렸다.
한때 역사의 뒷골목으로 물러났던 양김의 복귀가 이뤄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87년 대선 때 야권 후보 단일화의 길목에서 끝내 갈라서면서 루비콘 강을 건넜다. 두 사람의 권력욕이 낳은 ‘양김의 분열’은 민정당 정권의 재창출, 군사정부의 연장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며 민주정부로의 정권교체를 갈구했던 야권 진영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훗날 DJ는 자서전에서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너무도 후회스럽다”고 자책했다. YS도 DJ 서거 후 한 언론 인터뷰에서 “천추의 한이 됐지. 국민한테도 미안하고…”라고 당시를 회고하며 통탄했다.
87년 이후 양김의 길은 협력보다 경쟁에 방점이 찍혔다. YS는 1987년 대선에서 2위를 차지하며 잠시나마 후보단일화 실패 책임론에서 DJ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다. 하지만 1988년 13대 총선에서 자신이 이끌던 통일민주당이 3당으로 전락하자 1990년 1월 당시 여당인 민자당과 김종필(JP) 총재가 이끌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결행하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
당시 YS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며 자신의 정치적 결단을 설명했다.
이후 YS는 집권당이던 민자당의 대표최고위원을 거쳐, 대선 후보로 선출됐고 1992년 대선에서 DJ와 숙명의 대결을 벌여 먼저 대권을 거머쥐었다.
대선에서 YS에 패한 DJ는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 영국으로 떠났다가 귀국, 1995년 지방선거 이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며 제1야당 대표로 정계에 복귀했고, 1997년 대선에서 4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 YS로부터 권좌를 넘겨받았다.
1997년 대선 당시 YS는 DJ의 비자금 의혹 사건에 대해 수사유보를 결정하는 등 정치적 중립을 지켜 DJ에게 대선 승리의 길을 터줬다.
하지만 양김씨는 87년 대선의 길목에서 등을 돌린 뒤 지난 2009년 DJ가 먼저 눈을 감기까지 22년간 반목의 세월을 보냈다.
DJ는 3당 합당 이후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어제의 동지’였던 YS를 맹렬히 공격했고, YS도 퇴임 후 DJ의 노벨상 수상까지 깎아내리며 DJ를 비난했다.
특히 두 사람의 관계는 YS의 아들 현철씨의 사면문제를 놓고 최악으로 치달았고 앙금도 깊어져 갔다. DJ 집권 후 문민정부 비리청산작업이 본격화되면서 현철씨 등 YS 측근들이 법적 심판대에 올랐고, 양김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대통령 권좌에서 물러나 야인이 된 YS는 DJ를 ‘배신자’로 부르며 독설을 퍼부었다. YS는 보수세력, DJ는 진보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두 사람의 불편한 관계는 DJ가 서거하던 2009년까지 이어졌다.
두 사람은 2009년 5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조우’했지만, 87년 후보단일화 실패 때처럼 서로를 외면한 채 다른 곳을 응시했다.
DJ가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독재’라는 표현을 써가며 이명박 정부를 정면비판하자 YS는 “이제 그 입을 닫아야 한다”고 일갈하며 맞서기도 했다.
그러나 YS가 그 해 8월 죽음의 문턱에 선 DJ를 전격 찾아가 문병한 뒤 취재진들에게 “이제 화해한 것으로 봐도 좋다. 그럴 때가 됐다”고 밝히면서 극적 화해가 이뤄졌다.
DJ 서거 후 과거 ‘민추협’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동교동과 상도동계 인사들이 다시 뭉치고, YS 주재로 만찬 회동을 하는 등 관계회복과 화해의 무드가 조성되기도 했다.
지난 대선 당시 상도동계 핵심인 김덕룡 전 의원이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문재인 의원을, 동교동계 핵심이었던 한광옥, 한화갑 전 대표가 새누리당 대선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 편에 각각 서는 엇갈린 행보를 보인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한국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서로에게 ‘숙명’과도 같았던 ‘후광'(後廣) 김대중과 ‘거산'(巨山) 김영삼. 두 ‘거목'(巨木)이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가면서 한국 현대사의 큰 한 페이지가 넘어가게 됐다.
민주화 투쟁을 상징하는 두 거인의 ‘퇴장’과 더불어 현대 정치사는 상징적인 변곡점을 맞았고, 민주화 시대 리더십을 넘어서 민주주의의 성숙은 물론 새로운 통합과 화합, 발전의 리더십을 창출하는 것을 우리 사회의 과제로 떠안게 됐다는 평가이다.